사고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색은 1879년 12월 어느 날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낡은 건물 3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심리학이 탄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방에서는 근엄한 중년의 교수인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가 실험장치 만드는 것을 두 젊은이가 돕고 있었다. 이 장치는 공이 플랫폼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 전신용 건반을 누를 때까지의 시간 지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Hunt, 1993). 나중에 연구자들은 이 시간 지체를 보다 복잡한 과제에서 요구되는 시간과 비교하였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자마자 건반을 누르도록 요구할 때 1/10초 정도에 반응하였으며, 소리를 지각하였다고 의식적으로 자각하자마자 건반을 누르도록 요구하였을 때는 2/10초 정도에 반응하였다. (자신의 의식을 자각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분트는 '마음의 원자'를-가장 빠르고 가장 단순한 심적 과정-측정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분트와 심리학 초기의 대학원생들이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최초의 실험이라고 간주하는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서 심리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학은 선구자적인 연구자들이 이끄는 다양한 영역, 또는 학파로 체제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기 학파에는 이 장에서 소개할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능주의(functionalism), 그리고 후속 장에서 소개할 게스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 행동주의(behaviorism),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등이 포함된다. [마음의 구조를 생각하다] 분트의 제자인 에드워드 브래드포드 티치너(Edward Bradford Titchener)는 1982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에 미국 코넬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소개하였다.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이 물질의 구조를 판별하는 것처럼 티치너도 마음의 요소를 찾아내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자기-반영적 내성(introspection,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을 시키는 것이었는데, 예컨대, 장미를 들여다보거나, 메트로놈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아니면 어떤 물질을 맛보면서 자기 경험의 요소들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즉각적인 감각, 심상, 감정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가? 티치너는 영국의 수필가 루이스(C. S. Lewis, 1960, 18~19쪽)와 함께 "우리가 전체 우주에서 외부세계의 관찰을 통해서 학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대상이 있다"는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루이스에 따르면 그 한 가지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내부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내성법이 시들해지자 구조주의도 사그라들고 말았다. 내성법은 영리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내성 결과도 상당히 신뢰롭지 못한 것으로 입증되었는데, 사람마다 달랐으며 경험하는 대상마다 달라졌다. 더군다나 최근의 연구들은 사람들의 회고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해코지한 이유에 대한 자기보고도 마찬가지다(Myers, 2002).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행위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가 십상이다. [마음의 기능을 생각하다] 단순 요소들로부터 마음의 구조를 조립하겠다고 희망하였던 사람들과는 달리-이것은 마치 조립하지 않은 부품들을 들여다보고는 자동차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우리 사고와 감정의 진화된 기능(function)을 고찰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였다. 냄새 맡기는 코가 하는 일이며, 생각하기는 두뇌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코와 두뇌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인가?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영향을 받은 제임스는 생각하기도 냄새 맡기와 마찬가지로 적응적이기 때문에, 즉 우리 선조들의 생존에 공헌하였기에 발달하였다고 가정하였다. 의식도 기능을 담당한다. 의식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 상황에 맞추어 적응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기능주의자(functionalist)로서 제임스는 현실적인 정서, 기억, 의지력, 습관, 그리고 순간순간 지나가는 의식의 흐름 등의 탐구를 주도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임스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그의 실험실이 아니라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강의와 저술에 있다. 제임스는 나쁜 건강과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을 때에는 천진난만하고 사교적이며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심리학에 관해서 내가 수강한 첫 번째 강좌가 바로 내가 개설한 강의였어"라고 회상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그의 재치 넘치는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 학생이 끼어들어서는 조금 더 진중하게 말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Hunt, 1993). 그는 자기 강의에 대해 학기말에 학생들에게 강의평가를 하도록 요청한 최초의 미국 교수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학생들과 가족, 그리고 아이디어의 세계를 사랑하였지만, 교정과 가팅 따분하기 그지없는 잡일에는 진저리를 쳤다. 한 번은 편집장에게 "교정본을 보내지 마시오! (만일 보내면) 개봉하지도 않은 채 반송하고 당신하고는 두 번 다시 마롣 안 할 거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Hunt, 1993, 145쪽). 제임스는 1890년에도 대단한 용단을 내렸는데, 하버드 대학교 총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세미나에 여학생인 메리 컬킨스(Mary Calkins)가 등록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Scarborough&Furumoto, 1987). 컬킨스가 세미나에 참석하자 다른 모든 대학원생들이 수강을 취소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는 여성들에게 참정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임스는 그녀만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였다. 나중에 그녀는 하버드 대학교 박사학위가 요구하는 모든 필수조건을 충족시켰으며, 종합시험에서도 모든 남학생들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버드 대학교는 그녀가 취득한 학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 래드클리프 대학의 학위를 제안하였는데, 이 대학은 하버드 대학교의 자매대학이며 학부만 개설된 여자대학이었다. 컬킨스는 이러한 차별대우에 맞서서 학위를 거부하였다. 한 세기가 넘게 지나서야 심리학자와 심리학도들이 하버드 대학교에 로비 활동을 벌여서 그녀가 획득한 박사학위를 사후에 수여하게 되었다(Feminist Psychologist,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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